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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茶山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각적 철학자이자 과학자

다산의 생애

다산(茶山) 정약용은 민중의 편에 섰던 선구적인 인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다. 그는 약자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역경에 괴로워하면서 조선 사회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꿈꾸는 자만은 아니었다. 구체적이고 실천가능한 해결책들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된 서양의 책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서적까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읽었다. 이러한 오랜 탐색을 통해 독창적이고 종합적 사유, 공공복지와 정의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산은 르네상스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그는 기술자였고 건축가였으며, 군사전략가였다. 그는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였다. 그는 지방 행정가들이 법적인 판단에 활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례들을 연구하여 편찬하였던 법학가였다. 그는 2000수가 넘는 감동적인 시를 남긴 시인이면서 음악학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의 차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은 조선차 연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다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정신적인 것이었다. 카톨릭에 대한 정부의 박해 가운데 카톨릭 신자인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편지가 발견되어, 그는 한반도 남서쪽 강진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18년의 삶을 보냈다. 그는 병약하고 아픈 몸을 추슬러가며 새로운 조선에 대한 비전을 글로 옮겼고, 우리들에게 수많은 저술을 물려주었다.

정약용은 대체로 ‘다산’으로 애칭되지만, 그는 고향에서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뜻을 지닌 ‘사암(俟菴)’이란 호를 좋아하였다. 이 외에도 ‘열수(列水)’ ‘철마산인(鐵馬山人)’ ‘자하도인(紫霞道人)’ 등의 호가 있으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초기생활과 교육

다산은 그의 훌륭한 아버지 정약전으로부터 심오한 유교적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학문적으로 우수한 요람에서 자랐습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유교 고전, 시, 그리고 역사적인 글의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교육은 지식과 깨달음을 평생 추구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학술적 성과

성리학 

다산의 철학적 이해는 단순한 학문적 담론을 넘어, 지성과 도덕적 신념의 융합을 구현합니다. 정통 성리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깊은 울림을 주었고, 연민과 사회적 조화에 기초한 실용주의적 접근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철학적 깊이와 윤리적 비전은 “맹자의 폭로”와 “인간 본성에 관한 조약”과 같은 주목할 만한 작품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인식론

다산은 인간 이해의 미로 속에서 지식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그의 저서 “정약용의 인간 본성과 학습론”은 인지, 사회, 도덕 발달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조명하는 빛으로 작용합니다.

과학적 탐구

다산의 지적 호기심은 유학의 한계를 넘어 경험적 탐구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의 천문학과 물리학의 선구적인 실험은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과학의 지혜를 모두 수용하는 선견지명을 강조했습니다.

레거시

다산의 유산은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세대를 초월해 감동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윤리경영과 사회복지에 대한 그의 영원한 헌신은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에 대한 현대적 논의를 반영합니다. 다산의 이름은 한국 문화의 태피스트리에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지성과 진실함, 그리고 연민의 영원한 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산 정약용의 인생 여정은 지적 깨달음과 도덕적 강인함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여유당집 與猶堂集

조선시대 문집은 자신이 직접 정리한 경우도 있고, 사후에 자손이나 제자들이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정약용의 경우에는 철저히 자신이 직접 정리하였다. 그것은 죄인 신분인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후대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저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유배지인 강진에서 이루어졌는데,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뒤로 죽기 전까지 계속 수정 및 보완하였다.
그는 회갑을 맞은 1822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저술들을 일정한 체계로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을 크게 ➊ 경집(經集), ➋ 문집(文集), ➌ 잡찬(雜簒)으로 분류하였다. 그중 경집은 특별히 ‘사암경집(俟菴經集)’이라 불렀다. 정약용은 이런 자신의 저술을 일정한 체계하에 정리하고 ≪여유당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배지에서 저술할 당시에는 제자들이 저술을 도와주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뒤로는 자신의 일을 도와줄 제자가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각 책마다 ‘여유당집’의 표기 위치에서 차이가 난다. 즉, 일부의 저술은 표제에 ‘여유당집’이라 하였고, 일부는 권수에 ‘여유당집’이라 하였으며, 또 일부의 경우에는 권수제 아래쪽에 ‘여유당집’이라 표기하였다. 이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술을 일정한 체계하에 다시 필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저술을 그대로 가져다 ≪여유당집≫의 체계하에 ‘여유당집’이란 글자만 써넣어 재편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잡찬의 경우 대부분 ‘여유당집’의 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완전히 마무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 저작의 필사본 중에서 ‘여유당집’이라는 표기가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버클리대 아사미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개인소장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대체로 24×15㎝ 내외의 작은 크기이고, 무늬 없는 짙은 갈색 표지에 4침 선장(線裝)한 형식은 중국 책과 유사하다. 검은색 줄을 친 원고지에 10행 22자로 필사하였다. 이는 정약용 저술에 공통된 원고지와 같은 것이다.

‘여유당집’이라는 표기는 ≪시경강의(詩經講義)≫,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상례외편(喪禮外篇)≫, ≪이례초(二禮抄)≫, ≪사례가식(四禮家式)≫, ≪상의절요(喪儀節要)≫,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사전(周易四箋)≫, ≪춘추고징(春秋考徵)≫, ≪여유당집잡문(與猶堂集雜文)≫,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 ≪풍수집의(風水集議)≫, ≪여유당시집(與猶堂詩集)≫, ≪여유당문집(與猶堂文集)≫, ≪경세유표(經世遺表)≫,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민보의(民堡議)≫ 등의 필사본에서 보인다.

정약용 저작 필사본의 전승 과정에 대한 개별적 연구가 축적되었다. ≪여유당집≫에 본격적으로 주목한 연구는 조성을(2004)에 의해 수행되었다. 조성을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수록된 목록을 ≪여유당집≫을 위한 구상이었다고 파악하고, ‘자찬묘지명 체제’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김문식은 ‘자찬묘지명 체제’에 따라 ≪여유당전서≫ 경집을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문집 형식 또한 일반적인 학자들의 문집과는 전혀 다르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문집이 시문과 서간, 그리고 관직 생활 중의 상소문이 중심인데 반해, 정약용의 문집은 경학 연구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고, 시문은 물론이고 별도의 저작도 상당수에 이른다. 따라서 때문에 기존 문집 형식에는 맞지 않는다. 정약용은 이 때문에 ≪여유당집≫이라는 체계 속에 자신의 전체 저술을 망라하여 정리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집 체계는 중국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지만 조선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박철상ㆍ김보름)

다산과 차[다병 茶餠, 떡차]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배지 강진에서 18년을 보냈다. 다산(茶山)이란 호는 그가 10년간 거주했던 초당의 뒷산 백련사(白蓮社) 석름봉에 차나무가 많아 ‘다아산(茶兒山)’이라 불린 것에서 유래하며, 그가 강진에 머무는 동안 즐겨 사용하였다. 다산은 유배 전부터 차를 마셨고 차에 대한 지식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진에서는 본격적으로 차를 제조해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다산의 떡차를 ‘만불차(萬佛茶)’라 이름 짓고, 영남의 죽로차(竹露茶), 밀양의 밀성차(密城茶)와 함께 조선의 명차로 꼽았다.

다산은 다산 초당에 정착하면서부터 봄이 되면 차를 만들 도구를 미리 준비하고, 제자들에게 시키거나 손수 찻잎을 따서 겨울까지 마실 차를 만들어 비축하였다. 이렇게 차를 즐겼던 습관은 강진에서 뿐만이 아니라 고향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와서도 지속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다회(茶會)라 할 수 있을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강진에서 보내 온 곡우에 딴 잎차 1근, 입하의 늦은 찻잎으로 만든 떡차 2근으로 차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죽기 6년 전(1830), 강진 시절 막내 제자인 이대아(李大雅, 李時憲), 1803~1860)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 몇 년 동안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쇠잔한 몸뚱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다병(茶餠) 뿐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다산에게 차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취향 이상의 음료로서,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이유로 차를 마셨던 것이다.

다산이 좋아했던 차 종류는 은은한 향이 감도는, 위에 자극이 적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차, 다병(茶餠, 떡차)이었다. 그는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서(三蒸三曬) 곱게 갈았고, 마시기 좋도록 최대한 곱게 갈기를 원했다. 그리고 석천(石泉)수와 잘 섞어 반죽하여 작은 떡 모양을 만들어 햇볕에 잘 말렸다. 잘 말려진 작은 다병들이 바람이 잘 통하는 망태기에 넣어져 초당의 벽에 매달려 있을 풍경이, 저술에 몰두하며 간간히 다병을 우려 정신을 일깨웠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산초당에서 백년사까지는 다산이 늘 산책하며 사색하던 길이 이어져 있다. 그 곳의 혜장(惠丈) 스님은 다산이 차를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보였고 다산에게 유학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대흥사의 젊은 초의(草衣, 1786~1866) 스님도 차에 관심을 갖고 초당을 드나들었다. 다산은 보림사(寶林寺)의 버려진 차밭을 안타깝게 여기며 스님들에게 차를 만들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이 세 다인들은 남도의 버려진 차밭을 일구고 조선차를 부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丁學淵)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초의 등과 교류하며 조선 선비의 차 문화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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